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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눔이 있는 공간

Writer's picture오천호 목사

[8/9]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? (왕하 21: 1-9)

히스기야 왕이 죽고

므낫세가 왕이 되어

유다를 55년 동안

다스리게 된다(1절)

     

그런데..

므낫세는

히스기야 와는 다르게


다시 악을 행하며

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

태양과 달의 신을

예배했다(3절)

     

므낫세가 왜 이렇게

다시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까?

     

2절에서는

이방사람의 가증한 일을

‘따라서’ 했다고 말하며..

     

3절에서는

아합의 행위를

'따라서' 했다고

기록한다.

     

우상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우상을 섬기던

세상의 모습이

그의 마음에 더 끌렸던 것이다.

     

므낫세는

우상들이 보여주는 풍요와

세상 사람들의 목소리를

듣고 살았다.

     

또한 므낫세는

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성전에 세웠다고 했는데(7절)

     

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따라서

우상을 만들었던 것이다.

     

내 생각과 욕심이 그리고 세상의 목소리가

므낫세의 마음에

가장 중요한 목소리? 였다고 할까!! 반면 그러한 가운데

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.

     

하나님의 이름을

예루살렘 성전에 두신다고

말씀하셨고(4절, 7절)

     

하나님을 따를 때

그들이 세상에 떠도는 자가

되지 않게 하실 것도

말씀하셨다(8절)

     

그러나

이스라엘은

하나님의 음성을

듣지 않았다(9절)

     

오히려

'므낫세의 꾐'을 받았다고

했는데

     

그 뜻은

므낫세의 말을 듣고

므낫세의 모습을 따랐다는

의미이다.

     

므낫세는

세상과 자기의 목소리를

듣고 살았고..

     

백성들은

므낫세의 말과 그의 목소리를

듣고 타락했다.

     

그 결과

하나님의 목소리가

그들의 마음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.

     

나의 삶은 어떠한가?

     

오늘 나의 마음과 삶에

가장 크게 들리는 것은

어떤 목소리일까?

     

내 감정에서 나오는 목소리..

내 경험에서 나오는 목소리..

내 욕심과 교만이 말하는 목소리..

     

내가 만난 환경과 문제가

나에게 위협하는 목소리인가?

아니면

하나님의 목소리인가?

     

나를 포함한

모든 인간은

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닌

     

내 목소리와

여러가지 혼란한

세상의 목소리를

듣는 것에 익숙하다.

     

하나님이

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고

수많은 혼란한 목소리에

파묻혀서 살아가는 삶..

     

이 아침

다시 주님 앞에

서기 원한다.

     

그리고 내 마음 속에

수많은 복잡한 목소리를 멈추고..

     

주님의 음성과

주님의 사랑과

주님의 임재를 깊이 묵상하며 그 목소리를

듣고 사모하기 원한다.

     

나의 목소리와 내 욕심과 내 뜻이 아닌

주님의 선하신 뜻과

주님의 선하신 통치가

나의 마음과 삶과

모든 곳에 넘치므로..

     

주님의 목소리가

나를 다스리시는

복된 하루가 될 것을

기도한다.

    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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